6.25전쟁 10대 미스터리에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습니다.
전쟁 직전에 육군 부대의 이례적인 휴가 외박의 경우,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등 다양한 미스터리에 대해서 오늘 알아볼까 합니다.
목차
6.25전쟁 미스터리
6.25전쟁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과 진행에는 여러 가지 의문과 의혹이 남아있습니다. 이번에는 6.25전쟁에 대한 풀리지 않은 10대 미스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선 부대에서는 북한군의 대규모 남침 징후를 보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8사단은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북한군 유격대를 토벌하면서 생포한 포로들이 남침을 예고했으나, 육군 본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1. 그러나 이 보고가 묵살된 주체는 한국군 수뇌부가 아니라 미국이었습니다. 육군 본부는 6월 23일에 미국 측에 적의 남침 징후를 보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1950년 상반기 내내 지속된 위기설과 동일하게 취급했습니다2.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 이동
6.25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많은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라는 점입니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이나 지형은 커녕 부하들의 신상 파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1. 이 인사 이동의 배경에는 당시 군부와 정부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군부는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고, 정부는 군부의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부는 군부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인사 개혁을 추진했고, 군부는 이에 따르거나 반항하거나 했습니다3.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 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습니다. 부대 교체도 조금씩 해야 하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부대를 동시에 교체하는 바람에 전력 공백을 야기했습니다1. 이 교대의 목적은 전후방 부대의 전력을 균형있게 유지하고, 전선 부대의 휴식과 훈련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대는 북한군의 남침 시점과 겹쳐서, 전선 부대는 적에게 놀라며 흩어지고, 후방 부대는 적에게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4.
북한의 평화 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 경계령 발동
그 이유는 6월 10일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하여 평양 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 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6월23일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 경계령을 해제한 점입니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북한 측은 남북 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시지를 받으라 했습니다. 남한 측은 이들을 그날 38선 남방 1km 지점에서 맞아 메시지를 인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 감시 위원단에게도 수교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경찰들이 이들을 체포했는데 북측은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강력한 무력 행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데도 육군 본부는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 경계 태세를 해제한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군 본부는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습니다1. 정말 황당한 것은 육군 본부 정보 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2.
육군 장교 클럽 댄스 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를 연다고 전 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참석 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습니다.
적의 남침 이후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투입해 불필요한 희생 강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 상식을 깬 명령이었습니다. 시간을 벌려는 목적으로 보이나 이는 적의 경험치만 높여줄 뿐 적에게 피해를 입힌다든가 시간을 벌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적의 공세로 한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 ~ 27일 중앙방송은 한국군이 반격, 북진 중이라고 허위 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 판단을 그르치게 했습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 중이던 한국군이 상황 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군 본부는 그들을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케 해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명령은 채병덕 소장의 책임이었으며, 그는 이후에도 전력 배치와 작전 지휘에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한강교 조기 폭파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한국군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에 한국군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 그리고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했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 고관, 육군 참모 총장이 국민들에게 이 사항을 미처 알리지도 않고 한강 이남으로 도피한 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 행위였습니다.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들만 슬그머니 빠져나간 뒤 탈출구를 봉쇄해버린 짓이었습니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 최창식 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 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의 죽음
6.25전쟁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는 채병덕 소장의 죽음입니다. 그는 6.25전쟁 초창기에 많은 실수와 과오를 저질렀으며, 북한과 동조하는 세력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 전쟁 중에, 그것도 전쟁 초기에 죽게 됐을까요? 타살일까? 자살일까? 이 의문들은 여러 가지 증언과 자료를 통해 일부 해소될 수 있습니다. 채병덕 소장은 6.25전쟁 발발 후 좌천되어 영남편성관구사령관이라는 희한한 직책명으로 전직되었습니다. 그는 전선 후방을 떠돌아다니면서 병력과 물자를 모으고, 미군과 연락하고, 북한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남한군과 미군에게 혼란과 불신을 야기했으며, 북한군에게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결국 그는 1950년 7월 18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사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명예롭지 못했으며, 그의 실책과 미스터리는 역사에 바르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요인과 실패 요인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담한 작전 중 하나였습니다. 미군의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이 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으며, 남한과 유엔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전이 성공한 요인과 실패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맥아더 장군의 대담하고 창의적인 작전 계획과 지휘력
- 남한군과 유엔군의 희생과 협력
- 북한군의 방심과 과신
- 인천의 지리적 특성과 조석 변화
-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막은 정치적 외교
인천상륙작전의 실패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천항의 수로와 해안 방어 시설
- 남한군과 유엔군의 전력 부족과 장비 결함
- 북한군의 저항과 반격
- 날씨와 바람의 변화
- 소련과 중국의 개입 가능성